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쓰메 소세키 (문단 편집) == 생애 == 1867년 (게이오 3년) 2월 9일 현재의 [[도쿄도]] [[신주쿠구]] 기쿠이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의 집안은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던 가문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상당히 쇠락한 상태였다. 나쓰메 가문은 가구라자카에서 다카다바바에 이르는 이 일대 11개 마치(町)를 관할하는 나누시(名主) 직을 대대로 세습해 왔다. 나누시란 [[막부]]나 [[다이묘]]로부터 특정 지역의 행정 ‧ 경찰 ‧ 사법 업무를 위임 ‧ 하청 받아 수행하는 직책으로서, 대체로 그 지역의 유지가 맡았다. 담당 업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권력과 함께 급여 외의 부수적인 수입도 얻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소세키의 아버지 나쓰메 고헤이 나오카쓰 또한 그 아버지로부터 나누시 직을 물려받았다. 소세키는 나쓰메가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金之助)이다. 그가 태어난 때는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한 대혼란기였다. 1867년에 [[대정봉환]]이 선포되고 1869년 이르기까지 신정부군과 막부군 간의 내전이 지속되었다.([[보신 전쟁]]) 막부가 붕괴하고 신정부가 대권을 잡은 이후에도 신정부가 체계를 잡을 때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막부의 녹을 먹던 나쓰메 가문은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긴노스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고품점에 [[양자(가족)|양자]]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를 데려옴으로써 그의 [[입양]]생활은 며칠 만에 끝이 났다. 낡은 가재도구를 늘어놓은 가판 옆에 밤이 늦도록 나와 있는 아기가 너무 불쌍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고헤이는 50살이 넘었고, 어머니 지에도 40살을 넘긴 나이였다. 그들에게는 그 많은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1868년, 킨노스케는 다시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 부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시오바라는 지금의 신주쿠 2초메(新宿二丁目)에서 나누시를 맡은 젊은이로, 어려서부터 나쓰메가의 일을 도우며 동시에 나쓰메가의 후원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시오바라 내외를 이어준 것도 나쓰메 고헤이였다. 시오바라 부부에게 긴노스케의 입양은 나쓰메가에 은혜를 갚는 일이었으며, 또한 대를 이을 아들을 들여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킨노스케는 시오바라가에서 시오바라 긴노스케라는 이름으로 유년을 보내게 되었다. 시오바라 부부는 킨노스케를 제멋대로 하도록 오냐오냐 키웠는데, 이는 나중에 장성한 그로부터 봉양을 받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다. 후에 소세키가 쓴 글들을 보면 어린 긴노스케도 양부모의 행동에 애정이 담겨있지 않았음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눈팔기》에서 이러한 언급들을 많이 볼 수 있다.]어쨌든 시오바라 긴노스케로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7살 때 사건이 터지고 만다. 쇼노스케의 [[불륜]] 행각이 들통나고 만 것이었다. [[부부싸움]]이 이어졌고, 킨노스케는 잠시 나쓰메가에 맡겨졌다. 그는 양부모에게 들은 대로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 믿고 지냈다. 킨노스케는 얼마 안 있어 다시 시오바라가로 돌아갔지만, 시오바라 부부는 그가 9살 때 이혼하고 말았다. 시오바라는 불륜 사건 때문에 호장(戶長)[* 7~8개의 마치를 엮은 소구小区의 행정 책임자.] 자리를 잃게 되었다. 결국 킨노스케는 파양되어 나쓰메가로 돌아왔다. 조부모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실은 친부모였다는 것도 이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린 킨노스케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륜]]을 저질러서 자신이 맺어준 인연과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일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찾아온 시오바라의 뻔뻔함에 고헤이는 대노하였다. 친부와 양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킨노스케의 호적 문제였다. 킨노스케가 파양되어 돌아왔을 때, 나쓰메가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권세를 회복한 상태였다. 나누시가 폐지된 이후에 고헤이는 제4대구(大区)의 구장(区長)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도쿄가 6개의 대구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구장이란 오늘날의 구청장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의 권세는 그의 자택에서 카구라자카의 구청에 이르는 자신의 출근길을 나쓰메자카(夏目坂)라고 이름 붙이고, 그가 사는 동네의 행정구역명을 우물(이, 井)에 국화(기쿠, 菊)가 그려진 나쓰메 가문의 문장에서 따와서 기쿠이초(喜久井町)라 명명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친부는 킨노스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고헤이의 노후를 책임져 줄 아들들이 있는 마당에 어린 긴노스케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시오바라가 이혼하여 긴노스케를 키울 수 없게 되었으니 그를 먹이고 재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나쓰메가가 맡게 되었지만, 호적은 계속 시오바라가에 남겨두어 시오바라로 하여금 양육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시오바라 또한 이혼까지 한 처지였으니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줄 킨노스케를 호적에 붙들어두려고 하였다. 따라서 긴노스케의 학비며 용돈은 모두 시오바라가 부담하였다. 양가의 의견 일치로 긴노스케는 나쓰메가에 살면서도 시오바라츠 킨노스케로 남게 되었다. 친부는 긴노스케를 조금도 아들로 대해주지 않았으니, 그는 친부모와 살면서도 남의 집에 얹혀사는 꼴과 같았다. 긴노스케가 나쓰메 긴노스케로 돌아온 것은 21살 때의 일이었다. 그것도 나쓰메가의 대를 이을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결핵]]으로 죽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변변찮은 3남보다 학문에 재능을 보이던 긴노스케가 탐나게 된 고헤이는, 시오바라와의 교섭 끝에 과거의 양육비 조로 240엔을 지불하고 긴노스케의 호적을 돌려받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온 것이다! 하지만 킨노스케가 소세키라는 필명으로 유명해지자 시오바라는 계속해서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 후로도 아들―돈을 둘러싼 친부와 양부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소세키는 인격 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두 가문 사이에서 받은 고통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무너져 가는 자아를 붙들고 광기를 극복하기 위해 썼던 글들이 그를 문호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특히 친부와 양부 사이에서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은, 그를 누구보다도 예민한 근대 사회의 비판자로 만들었다. 11살의 소세키는 나이에 이미 친구들과 회람 잡지를 만들어 <마사시게론>(正成論)이라는 일본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한 논문을 [[한문]]으로 써냈을 만큼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평소에도 [[한문]], [[한시]]를 애독, 애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명하던 소세키는 [[제국대학]][* 도쿄대학이 도쿄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1897년 [[교토제국대학]]의 개교로 복수의 [[제국대학]]이 생겨 제국대학 간 구별이 필요해져서 바꾼 이후부터다. 그 전에는 그냥 제국대학이었고, 최초 개교했을 때에는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종전 후 1947년, 식민지의 경성제대와 다이호쿠제대를 제외한 본토의 7대 제국대학들의 간판에서 '제국'이 일괄 삭제되어 지금의 도쿄대학을 신제 도쿄대학, 제국대학 이전의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의 등용문이라 통하는 [[구제고등학교|대학 예비문]][* 現 [[도쿄대학]] 교양학부. 소세키가 수학하던 중 제1고등중학으로 분리되었다가 이후 제1고등학교로 개명된다. 제1고등학교는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신제 도쿄대학으로 재통합되었다.] 예과에 입학했다. 예비문 입학 전 소세키는 원래 [[구제중학교|도쿄부립 제1중학교]]를 다녔으나 한문을 배우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한문학 교육 기관인 니쇼학사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영어]]를 배워야 전망이 좋다'는 형의 권유에 따라 다시 영어를 가르치는 세이리쓰학사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구제고등학교|대학 예비문]]에 진학했다. [[대학예과|대학 예비문 예과]] 시절에 [[복막염]]을 앓아 낙제한 적도 있었지만, 추스르고 심기일전하여 결국 졸업 때까지 수석을 차지했다. 이후 예과를 졸업하고 본과 [[영문과]]에 진학한다. 본과 시절에 훗날 근대 하이쿠를 발전시킨 [[마사오카 시키]][*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첫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마사오카의 필명인 시키(두견새)에서 따온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에 연재했다.]와 교우하면서 '소세키'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마사오카의 영향을 받아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하이쿠에 심취했다. [[1892년]]에는 분가와 동시에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기고[* [[병역기피]]설이 유력하다. 당시 개척을 위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2&aid=0001940946|홋카이도로 본적을 옮기면 징집이 유예]]되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징집 면제를 내리는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홋카이도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 [[홋카이도]] 거주민에게 병역 면제를 내렸는데, 이 규정은 [[1898년]]에 폐지되었다.] 그해 [[5월]] [[와세다대학|도쿄전문학교]][* 도쿄전문학교가 와세다대학으로 승격된 것은 1920년이다. 이날 사숙인 게이오기주쿠(경응의숙)도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동시 승격되었다. 그래서 [[소케이]]는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이 되었고, 이는 소케이가 현재까지도 일본 양대 명문사학으로 굳건히 서 있는 기반이 되었다.]의 강사로 출강했다. [[1893년]]에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 강사와 중·고등학교 선생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드러난다. [[1896년]]에 [[귀족원(일본)|귀족원]] 서기관장[* 귀족원의장 비서실장 겸 대변인에 상응하는 직책이다. 내각총리대신 비서실장 겸 대변인인 [[내각관방장관]]의 전신도 내각서기관장이었다.]인 나카네 시게카즈의 딸 교코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1900년]] [[문부성]]의 [[국비유학생]] 1호가 되어 [[영국]]으로 2년간 [[유학]]을 떠난다[* 소세키는 자신의 에세이 문학론에서 '[[영국]] [[유학]]은 관(국가)의 명령이었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더라면 절대로 안 갔다. 2년 동안 굉장히 고생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원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등록할 예정이었으나 포기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 강의를 청강했다. 하지만 유학 비용 부족과 고독감으로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영국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소설과 시를 읽다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애당초 인간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고민했다. "소세키가 한밤중에 불도 켜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고 일본인 친구는 글로 남겼다. 소세키는 영국 런던 유학 중에 신경쇠약, 특히 감시공포증에 시달렸다. 또한 [[독일]]에서 온 유학생 [[이케다 기쿠나에]][* [[MSG]]의 원료인 글루타민산을 발견한 화학자]에게 영감을 받아 과학이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고, 홀로 영문 모를 연구에 몰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케다가 [[일본 정부]]에 보낸 전보에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나쓰메 미쳤다.'''" 정부로부터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일단 할 일은 다 마친 뒤에 귀국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얻은 신경쇠약 증상은 귀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실상 소설을 창작한 것 자체가 이 신경쇠약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 행위였다고도 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영국 유학시절에 [[런던 탑]]을 관광하며 느꼈던 감정을 단편소설 <런던탑[* 倫敦等. [[프랑스]]-불란서와 같은 맥락. [[페르소나 3]]의 시험 문제 답안으로 '론돈탑'이 나온 바 있다만 사실 [[한국 한자음]]을 따르자면 윤돈탑이라 읽는 것이 맞는다.]>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에는 다니던 학교도 휴직하여 연봉이 적게 나왔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빚도 많이 졌으며 양부와 유학 즈음에는 완전히 몰락한 처가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가 유학 중에 100엔, 일본에서 머물던 시절에 100엔, 귀국해서 100엔 정도 빚이 있었다. 이 당시 목수의 하루 일당이 1엔, 임시 교사의 월급이 8엔이던 시절이다. 특히 장인 나카네 시게카즈가 고위 관직에 있었던 터라 상당한 원조를 받았었지만,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직후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물갈이를 당해서 관직을 박탈당한 데다가, 손을 댔던 주식까지 폭락하는 바람에 거액의 빚을 지어 사위 나쓰메에게 원조를 끊었다. 경제적으로 상당 부분을 장인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나쓰메 부부의 가계도 더불어 파탄이 난 것. 결국 제1고등학교 강사,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했고, [[메이지대학]]에도 출강하며 벌이를 늘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신경쇠약을 다스리고 잔돈푼도 좀 벌어볼 목적으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 다른 일이란 바로 문예지에 첫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는 1화 분량의 단편으로 기획되었으나 반응이 좋아 계속 연재하였다. 처음 작품을 연재한 지면은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 호토토기스는 우리말로 '[[두견새]]'를 뜻한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울지 않는 두견새|두견새가 울지 않으면…]]'이라며 성격을 비교한 일화에서 언급된 바로 그 ~~노부나가에게 [[끔살]]당하는~~ 새가 호토토기스이다.]>>. 앞에서 언급한 <런던탑> 등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고 1906년엔 단편집을 출판함과 동시에 2번째 장편 작품인 <[[도련님]]>을 <<호토토기스>>에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에 드디어 교직을 전부 사직[* 소세키의 연봉은 1500엔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걸 접고 작가로 뛰어든 것이다.]하고 1년에 100회가량 연재 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아사히 신문]]의 전속 작가가 된다. 1909년에는 대학 시절 친구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대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그 여행기인 <만한 여기저기(満韓ところどころ)>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문부성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통보받았으나 거부했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한 건 1920년대부터였고, 당시 일본제국에서는 박사 학위를 대학이 아니라 문부성에서 수여했었다. 이때 소세키는 지병인 위궤양으로 입원 중이었는데 문부성에서는 그런 소세키에게 다짜고짜 박사 학위를 받으러 수여식에 오라고 일방 통보를 하는 등 태도가 다소 권위적이었다. 소세키는 원래 박사를 받을 생각도 없었거니와 국가와 사회의 이런 권위성에 더 불만을 가져 당연히 수여식에 안 갔는데 끈질기게도 문부성에서는 박사 학위를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본인은 거부했지만 일단 문부성에서 그에게 박사 학위를 취소했다는 기록도 없고, 그들의 싸움은 이도저도 결론이 안 난 채 흐지부지되었다. 1916년에 지병이 악화된 탓에 188회를 마지막으로 <명암>의 연재를 중단했다. 결국 그해 12월 9일 위궤양 악화로 인한 내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49세. 사망 익일 시신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해부학실에서 병리학자 나가요 마타오에 의해 부검[* 돌연사한 막내 히나코의 부검을 요청했었다.]되었는데 이때 적출된 뇌와 위가 기증되어서, 뇌는 [[에탄올]]에 잠긴 상태로 현재까지도 도쿄대학에 계속 보관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